'신병주'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8.03.07 을사사화 (1545년) : 명종의 즉위와 여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2. 2008.03.07 기묘사화 (1519년) : 개혁정치의 빛과 그늘
  3. 2008.03.07 갑자사화 (1504년) : 폐비 윤씨의 죽음과 후폭풍
2008. 3. 7. 15:27

을사사화 (1545년) : 명종의 즉위와 여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1545년 명종의 즉위와 여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신병주(중세사2분과)


  조선을 대표하는 여걸은 누구일까?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기본적으로 차단된 만큼 우선 왕실 여성들이 떠오른다. 왕자의 난 때 주저하던 태종을 독려했던 원경왕후 민씨, 내훈을 지은 소혜왕후 한씨,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 15세의 어린나이에 66세 영조의 계비로 들어왔지만 19세기 세도정치의 폭풍전야를 이끈 정순왕후 등 대표급 여성들의 면면이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20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불교중흥책과 같은 정책을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이는가 하면, 여주(女主)가 나라를 말아먹는다고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문정왕후. 여기에 윤원형, 정난정, 보우 등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인물들이 그의 주변에 동시에 등장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조선시대 여걸의 대표주자라 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1. 중종의 사망과 대윤, 소윤의 대립

  중종은 모두 3명의 정비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은 단경왕후 신씨였다. 그러나 그녀의 부친 신수근이 연산군의 매부로서 중종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정 이후 바로 폐위되었다. 이어 장경왕후 윤씨가 계비로 들어왔다. 장경왕후는 왕실의 기대대로 아들(인종)을 낳았으나, 1515년 사망하였다.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두번째 계비였다. 1520년 인종이 6살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면서 중종의 후계 구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1534년 계비 문정왕후가 아들(명종)을 낳으면서 중종의 후계자 문제는 복잡한 권력 투쟁의 양상을 띠게 된다.

  특히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과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이 중심이 된 외척정치의 대립 양상을 띠고 여기에 훈구와 사림이라는 대결 구도가 복합되면서 권력 투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윤임을 지지한 유관, 유인숙 등은 대윤으로, 윤원형을 지지한 윤원로, 윤개 등은 소윤으로 지칭되었다. 권력 투쟁은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기득권을 잡고 있던 대윤 세력에 대해 소윤 세력이 저항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의 존재는 권력 투쟁의 큰 변수가 되었다.

  양측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중종이 사망하고 고명대신들의 주선으로 이미 세자로 책봉된 인종이 1544년 11월 즉위함으로써 양측의 권력 다툼은 대윤의 승리로 일단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인종은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불과 8개월 만에 후사도 없이 사망하였다.

  왕위는 1년 전 경원대군에 책봉되었던 명종이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명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였고, 관례에 따라 생모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조선의 역사에서 최초로 제대로 된(?) 수렴청정의 시작이었다.  

  명종이 즉위함으로써 정국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특히 인종은 즉위하면서 이언적, 송인수 등 외척정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림파들을 등용하고,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김정 등을 복관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외척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종의 즉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견제하는 사림파들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이었으며, 마침내 명종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들을 대거 숙청시키는 을사사화(1545년)를 일으킴으로써 4대 사화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다.  



2. 문정왕후와 여인천하

  몇 년 전에 중종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여인천하’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서슬 시퍼런 여인들의 암투에 왕과 대신들의 무능은 극에 달했으며, 중흥지주(中興之主)로 평가받던 중종도 왕위계승을 노리는 여인들의 등쌀에 수시로 소리만 버럭 지르는 우유부단한 군주로 내비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여인들의 파워는 막강했다. ‘뭬야’라는 유행어와 질투의 화신처럼 보이는 표독한 눈매로 시청률 증가에 혁혁한 공을 세워 주연급으로 급부상한 경빈 박씨를 비롯하여, 신분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권모술수로 최고의 파워집단에 줄을 댄 후 당대의 정객들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정난정, 여기에 후궁, 상궁과 나인들까지 가세하여 툭하면 험한 말을 뱉고 머리끄댕이를 잡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는 처절한 모습들이다.

  그런데 이들과는 일정한 차별을 두면서 교양과 품위, 그리고 냉철함으로 무장한 여걸이 한 사람 등장한다. 바로 문정왕후다. 학창시절 국사책에도 나오는 결코 낯설지 않는 인물 문정왕후, 그런데 기억력이 정확하다면 문정왕후는 그리 긍정적인 평가가 가해진 여인은 아니었다.

  수렴청정, 외척정치, 요승 보우의 등용 등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문정왕후가 이 드라마에서는 암투의 주역이면서도 상당히 기품 있게 묘사되었지만 역사적 진실은 그녀에게 매우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문정왕후(1501-1565) 윤씨는 중종의 계비이자 조선의 13대왕 명종의 생모이다. 중종대 후반부터 왕위계승의 중심에 서서 그녀의 소생인 명종의 즉위를 결국 성공시켰다. 1545년 보위에 오른 명종은 이제 겨우 12살이었고 실권은 당연히 문정왕후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수렴청정의 방식으로 국정의 최고 위치에 서서 1565년 사망 때까지 윤원형 등 친인척을 적극 등용하여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윤원형과 정난정의 가세로 명종대는 외척정치의 전성시대가 연출되었으며, 이들은 반대파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외척정치에 반감을 갔고 있던 사림파 학자들은 1545년의 을사사화와 1547년 양재역에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벽서(壁書)가 붙은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정미사화로 말미암아 대거 처형당하거나 귀양의 길에 나섰다.

  중앙에 비판세력이 없어지자 문정왕후는 더욱 날개를 달고 독재 권력을 유감없이 휘둘렀다. ‘윤원형의 재산이 나라의 재산보다 많다’는 말이 회자되었으며 왕후가 어린 왕을 꾸짖고 심지어 매를 들었다는 소문까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문정왕후는 여론을 무시한 채 불교의 중흥을 위해서 파격적으로 보우를 등용하였고 이 또한 엄청난 파란을 몰고 왔다.

  그녀의 전횡에 가장 강경하게 비판의 글을 올린 인물은 남명 조식(1501~1572)이다. 조식은 1555년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에서, ‘자전(문정왕후)은 과부 명종은 고아’라는 직설적 표현으로 문정왕후의 치맛바람을 비난하면서 당시를 ‘큰 나무에 백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다 빠진 형국’에 비유했다. 문정왕후의 측근 보우를 중심으로 한 불교 정책에 대해서도 성균관 유생들을 비롯한 양심세력은 수업거부와 동맹휴학으로 집권층의 정책에 저항했다.

  1565년 그녀의 사망으로 외척정치는 종말을 고했다. 날개를 잃은 척신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은 사림파의 탄핵을 받고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되었다가 정난정은 자살하고, 윤원형은 회병으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이제 역사는 전 시대의 모순과 부패를 극복하는 대안 세력 사림파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몇 사람의 권력욕으로 정상적인 정치 질서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민심이 이반하던 시대. 문정왕후는 바로 그 중심에 있던 여인이었다.

  오죽하면 실록에서 그녀가 죽었을 때 사관이 ≪서경(書經)≫을 인용하여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라고 했을까? 그녀 스스로는 교양과 정치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항변할 지도 모르지만 문정왕후는 분명 역사 발전의 대세를 거스르는 외척정치의 최정점에 서서 조선사회를 보수와 반동으로 몰고 간 주역임에 분명하다.



 3. 보우의 등용과 불교 중흥 밀어붙이기

  숭유억불 정책을 국시(國是)로 내건 조선사회에서 불교 중흥의 기치가 가장 높이 솟았던 시기는 바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기였다. 1550년(중종 5) 12월 15일 문정왕후는 선종과 교종 양종(兩宗)을 부활시키는 비망기를 국왕인 명종의 이름으로 내렸다.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여 불교 중흥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승려들의 도첩제가 부활하는가 하면 승려가 되기 위한 과거 시험인 도승시(度僧試)도 실시되었다. 봉은사 마당에서 시행된 도승시에서 급제한 승려 들 중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국난 극복에 크게 공헌한 이도 있었으니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파격적으로 보우를 등용한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책은 당시의 사류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원기(元氣)로 인식되었던 성균관 유생들로부터도 강한 저항을 받았다. 성균관 유생들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국가에서 불교를 중흥하는 움직임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선교 양종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권당(捲堂:수업거부)과 공관(公館:집단 휴학)으로 맞서기도 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불교 중흥의 싹은 그대로 꺾여 버렸다. 문정왕후가 죽은 후 보우 또한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그 곳에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현재 서울 강남의 최대 중심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봉은사. 이곳은 바로 450년 전 문정왕후가 보우와 함께 불교 중흥의 마지막 꽃을 피워보려 했던 공간이었다.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종의 무덤 옆은 인종의 생모인 제1 계비 장경왕후가 지키고 있었다. 자신이 죽어 중종 곁에 묻히려면 먼저 장경왕후로부터 중종을 떼 놓아야했다.

  1542년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와 의논하여 지금의 서삼릉에 있던 중종의 왕릉을 선릉(성종의 무덤) 부근으로 전격적으로 옮겼다. 지하의 중종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무덤(정릉)은 명당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잦았다. 홍수 때는 재실(齋室)까지 물이 차기까지 했다.

  결국 문정왕후는 중종 곁에 묻힌 소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사후 무덤은 지금의 태릉에 조성되었다. 중종은 결국 자신과 함께 했던 왕비 3명 중 어느 누구와도 영원히 함께하지 못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버지 성종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고나 할까?

  ‘태릉선수촌’, ‘태릉갈비’와 같이 태릉의 명성을 담은 용어들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정작 이곳이 조선중기 폭풍 정국을 이끈 문정왕후의 무덤이라는 사실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태릉을 찾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걸 문정왕후의 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출처 : 한국역사연구회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read.php?pid=3&id=265

Trackback 0 Comment 0
2008. 3. 7. 15:19

기묘사화 (1519년) : 개혁정치의 빛과 그늘

1519년 기묘사화, 개혁정치의 빛과 그늘

                                                                                                  신병주(중세사 2분과)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愛君如愛父)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白日臨下土)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昭昭照丹衷)

  1519년 12월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자신을 그토록 총애했던 국왕 중종이 내린 사약 앞에 섰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자부하는 마지막 시를 읊었다.

  거칠 것 없는 개혁정책을 진두지휘한 사림파 엘리트 조광조. 38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개혁성향이 짙었고 이를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개혁정책은 기묘사화의 참극을 불러왔고 개혁파 정치세력들은 허망하게 정치권에서 숙청되었다.



1. 훈구파의 반격, 꺾여진 꿈

  조광조의 개혁정치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훈구파는 초조했다. 위훈삭제 추진은 훈구파의 목을 노골적으로 조여 왔고, 궁지에 몰리게 된 훈구세력들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수십년 쌓아온 정치, 경제적 기득권이 애송이 조광조라는 인물의 출현 덕분에 한 순간에 무너질 지도 모르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훈구세력은 먼저 왕실이나 정치권에 심어둔 정치세력을 적극 활용해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우선 조광조는 왕권까지 넘보는 야심 차고 위험한 인물임을 유포시켰다.

  홍경주ㆍ남곤ㆍ심정 등 훈구파들은 후궁인 경빈 박씨를 동원하여 조광조 일파의 동향을 중종에게 비방하도록 하고, 궁중 나인을 시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 走와 肖를 합하면 趙가 되므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글씨를 만들고 이곳에 꿀을 발라 벌레가 갉아먹게 하여 궁중과 민심을 흉흉하게 했다. 모두가 훈구파들의 계산된 음모였다.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유교적 이상정치 주장과 왕권의 견제, 경연의 활성화에 점차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중종도 각종 보고를 통해 들어오는 조광조의 전횡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조광조의 참신한 개혁정책의 최초 후원자였던 중종은 자신을 왕위에 올린 훈구파를 과격하게 공격하는 조광조 일파의 급진성에 점차 불안해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수기(修己)를 통하여 국왕 자신이 성인(聖人)이 될 것을 요구하면서 왕권에 제약을 가하는 것은 특히 부담이 되었다.

  중종은 서서히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 세력들의 급진적인 이상정치 요구와 개혁정책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광조는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이것은 중종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이탈시키고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의 힘을 강고하게 결집시켜주는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모든 상황은 조광조 일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519년(중종 14) 11월 훈구세력들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왕궁에 잠입, 중종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고 비방하였다.

  중종은 드디어 조광조를 비롯하여 그와 함께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김식ㆍ기준 등 신진세력들에 대한 전격적인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정ㆍ김식ㆍ김구ㆍ윤자임ㆍ박세의 등 대부분의 개혁세력은 투옥되어 사약을 받거나 유배되었다.

  조광조는 김정ㆍ김식ㆍ김구와 함께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으로 있던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의 적극적인 비호로 목숨을 건지고 전라도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훈구파인 김전ㆍ남곤ㆍ이유청 등이 각각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이 되면서 정국이 바뀐 후, 조광조는 기묘년 12월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셨다.
 
 조광조의 숙청은 한 개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개혁노선을 지지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던 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는 등 큰 화를 당하였다. 이것이 조선의 4대 사화 중 세 번째인 1519년의 기묘사화로서 젊고 참신한 정치세력들이 개혁정책을 실천하려 하다가 좌초한 사건으로 평가박고 있다.

  조광조는 유배지 능주에서 한때는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왕 중종이 내려준 사약을 마셨다. 38세라는 짧지만 굵은 생의 끝이었다.



2. 개혁정치의 빛과 그늘

  기묘사화는 우리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인물이었던 조광조의 정치노선이 기존 보수세력의 반격을 받아 좌초한 사건으로 정리되고 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비록 정치적으로 패배한 것처럼 보였지만 조광조는 오히려 역사의 승리자로 남았다.

  16세기이후 우리 역사에서는 조광조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한 사림세력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으며,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이황이나 조식, 이이 같은 학자는 한결 같이 조광조를 높이 평가하였다.

  기묘사화이후 조광조 일파가 널리 보급했던 성리학 이념서 『소학』과 『근사록』이 잘 읽혀지지 않을 정도로 정치적, 사상적 파급효과와 그 후유증은 컸다. 조식과 같은 학자는 1519년 조광조의 부음을 듣고 사로(仕路)의 험난함을 알고 과거 공부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조광조의 행적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가지는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조광조가 학문적 식견이 쌓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책을 추진했고 한번 휘몰아친 개혁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하다가 실패했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조광조의 사림파 학통을 계승한 인물인 이황은 자신의 언행록에서 냉정하게 조광조를 평가하고 있다.

  ‘공(조광조)은 천품이 대단히 높았으나 학력은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가 소격서를 없애자고 논한 일만 보더라도 가히 엿볼 수 있다. 군신간의 의리가 어찌 그럴 수 있으리요. 이것은 정암(조광조의 호)의 지나친 데라 할 것이다. 임금을 요순처럼 받들고 백성에게 요순의 덕택을 입히려는 것은 군자의 뜻이기는 하나 당시의 사세(事勢)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서 할 수 있겠는가. 기묘년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당시에도 정암은 일이 실패할 것을 깨닫고 조화하려 했으나, 사람들은 도리어 그를 비난하고 심지어는 창끝을 돌려 공격하려는 자까지 있어 정암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다.’고 하여, 이황은 조광조가 일의 형세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무리하게 개혁정책을 추진한 점과 걷잡을 수 없는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 타협을 이루지 못한 점을 그 실패 원인으로 지적하였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옛 사람은 학문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려서 도를 행하기를 구했고, 도를 행하는 요체는 무엇보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다. 공(조광조)은 아깝게도 현철한 자질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능을 지녔으나,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너무 급하게 요직에 올라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로 권문세가의 비방을 막지 못하여 그 충성을 바치려 하자 참소하는 일들이 벌어져 몸이 죽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뒷사람들이 이를 경계하여 감히 바른 정치를 해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공이 비록 진퇴의 기미에는 밝지 못한 바가 있으나, 학자들이 공으로 말미암아 성리학을 숭상하며 왕도(王道)를 중히 여기고 패도(覇道)를 천하게 볼 줄 알았으니, 그가 끼친 공로는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이 태산과 북두와 같이 우러러보고 국가에서 표창함이 갈수록 융숭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고 하여 조광조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무르익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가 좌초한 사실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면서도 조광조로 인하여 성리학을 숭상하고 왕도를 중히 여기는 기풍이 진작되었음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3. 당대보다 후대에 얻은 높은 평가

  위에서 보듯이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이황과 이이는 조광조에 대해 깊은 존숭을 표시하고 그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을 사림파의 정통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가 추진한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이, 학문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된 점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시하였다. 훗날 이황과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하면서 조선성리학을 빛낸 인물로 나란히 서게 된다.    

  조광조는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파가 주체가 되어 모든 백성이 고르게 혜택을 받는 사회, 성리학적 이념이 온 나라에 두루 미치는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이라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사회의 실현을 위해 다양한 개혁정책들을 추진하였다.

  조광조가 추진한 개혁은 어쩌면 우리 역사발전 단계에서 가장 개혁적인 조처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지닌 급진성과 과격함, 그리고 개혁 지지기반의 상실 등으로 말미암아 개혁의 완성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에는 언제나 보수와 개혁의 진통이 따르는 시대가 있다. 조광조가 등장한 16세기 초반의 조선사회도 보수와 개혁의 흐름이 서로 충돌한 바로 그러한 시대였다. 그 시대를 돌파하기 위하여 개성이 강하고 젊었던 관료 조광조는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하고 원칙에 충실하면서 급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급진성과 과격성은 이에 반발하는 보수세력들을 결집시켜 주었고, 개혁은 미완인 채로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의 좌절은 역사에서 경직된 이념의 드라이브가 얼마나 위험한 길이었는지, 개혁의 길에는 엄청난 반발이 수반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개혁’이 화두로 떠오른 최근의 현실에서 조광조의 행적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그 실패 원인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시점이다.


출처 : 한국역사연구회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read.php?pid=3&id=261

Trackback 0 Comment 0
2008. 3. 7. 15:15

갑자사화 (1504년) : 폐비 윤씨의 죽음과 후폭풍

1504년의 갑자사화 - 폐비 윤씨의 죽음과 후폭풍 -

                                                                                                      신병주(중세2분과)

 1504년 연산군은 임사홍의 보고를 받고 치를 떨었다. 자신이 몰랐던 생모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것과 동시에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게 했다.

 일차적으로 어머니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성종의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이 끌려나와 격살을 당하고, 어머니의 사사 사건에 연루된 대신들이 줄줄이 처형을 당했다.

 희대의 풍운아 한명회조차 부관참시라는 최악의 형벌을 당했고, 김굉필, 최부 등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떠오른 사림파의 핵심인물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연산군의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연속으로 일으키며 ‘검증된 폭군’의 이미지를 굳혀갔다.



 1. 윤씨의 폐위와 죽음까지

 “왕비 윤씨는 후궁으로부터 드디어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나, 내조하는 공은 없고, 도리어 투기하는 마음만 가지어, 지난 정유년(1473년)에는 몰래 독약을 품고서 궁인을 해치고자 하다가 음모가 분명히 드러났으므로, 내가 이를 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이 함께 청하여 개과천선하기를 바랐으며, 나도 폐출하는 것은 큰일이고 허물은 또한 고칠 수 있으리라고 여겨, 감히 결단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뉘우쳐 고칠 마음은 가지지 아니하고, 덕을 잃음이 더욱 심하여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결단코 위로는 종묘를 이어 받들고, 아래로는 국가에 모범이 될 수가 없으므로, 이에 성화15년(1479년) 6월 2일에 윤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아아! 법에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는데,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이 있겠는가? 일은 반드시 여러 번 생각하는 것이니, 만세를 위해 염려해야 되기 때문이다.”

  1479년 6월 13일 성종은 윤씨를 왕비의 자리에서 퇴출시키는 파격적인 결정을 하고 이를 종묘에 고하였다. 교서에서는 투기죄와 궁인을 해치려 한 죄, 실덕(失德) 등이 언급되었지만 오래도록 성종과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한씨와 갈등을 빚어온 것이 원인이었다.

  차기 대권을 이어갈 아들(연산군)을 낳은 왕비에게 이토록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왕실에서 윤씨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폐출된 왕비 윤씨는 누구인가? 성종의 첫 번째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씨였다. 한씨는 1467년 12세의 나이에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469년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지만 성종과의 사이에 후사를 낳지 못하고 1474년(성종 7)에 사망하였다.

  이 때 왕의 빈자리를 메운 사람이 후궁으로 들어왔던 제헌왕후 윤씨(~1482)였다. 윤기견의 딸로서 1473년 숙의에 봉해졌던 윤씨는 1474년 8월 9일 일약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이어 11월에 원자 연산군을 낳음으로써 그녀의 주가는 최고에 이르렀다.

  출생연도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종 보다는 연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실록의 기록에서 그녀의 성격이 매우 강했음을 고려하면, 나이나 성격 면에서 결코 성종에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더구나 어린 성종은 누님뻘인 왕비 보다는 후궁들을 좋아했다. 소용 정씨와 엄씨를 찾는 발길이 잦았고, 제헌왕후 윤씨는 이를 바라만 보고만 있지 않았다. 윤씨는 연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민간요법을 쓰기도 했고, 후궁들이 자신과 세자를 죽이려 한다는 투서를 올려 정소용과 엄소용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투서의 실질적인 작성자가 윤씨로 밝혀지고,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이 발견되자 성종은 왕비의 폐출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때마다 윤씨를 변호한 것은 ‘원자의 생모’, 즉 차기 왕위 계승자 연산군의 어머니라는 확실한 무기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성종과 윤씨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성종이 후궁을 찾은 것에 반발해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태가지 벌어지면서 두 사람의 파국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여기에 시어머니 인수대비 한씨가 가세하였다. 조신한 며느리 보다는 아들과 맞먹는 며느리의 이미지를 보이는 윤씨가 시어머니에게도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인수대비는 마침내 성종에게 윤씨를 폐위할 것을 요구했고, 1479년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비가 사가에 쫓겨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가에 폐출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1482년 성종이 내려준 사약을 마시고 죽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7살의 왕자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을 까마득히 몰랐고, 1494년 성종은 죽으면서까지 100년 동안 폐비 윤씨의 일을 거론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지만 이는 불과 10년 동안도 지켜지지 않았다.

  성종의 뒤를 이어 ‘정상대로’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생모의 비극적인 죽음은 언젠가는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1504년 마침내 이 뇌관을 터뜨리는 자가 등장하게 된다.

  연산군의 측근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온갖 방법을 기획하고 있던 임사홍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계십니까?” 연산군에게 던진 임사홍의 이 한마디는 이후 수많은 선비들의 죽음과 귀양으로 점철되는 갑자사화의 서막이었다.  



 2. 갑자사화의 주모자 임사홍

  성종의 장남인 연산군의 이름은 융으로 장남으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정통성은 그에게는 큰 힘이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가 별다른 정치적 견제를 받지 않는 요인이기도 했다. 사실 조선은 왕위계승에 있어 장자상속 제도를 원칙으로 했지만 문종이나 단종을 비롯한 일부 왕을 제외하고는 그 원칙이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정종, 태종, 세종, 세조, 성종 등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왕은 모두 장남이 아닌 신분으로 왕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연산군의 프리미엄은 대단한 것이었고 그것이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가속화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무오사화로 사림을 정계에서 몰아낸 후 연산군은 훈구대신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 시점에서 연산군의 측근세력 임사홍은 그의 어머니 윤씨의 폐비사건을 연산군에게 알려 새로운 사화를 기획하였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죽을 때 연산군은 7살의 어린 나이였고 조정에서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상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 연산군의 측근세력으로 권력욕에 불탔던 임사홍은 기회를 틈 타 연산군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정보를 흘렸다. 윤씨의 폐비 사건에 사림파들뿐만 아니라 훈구파들도 많이 관련되어 있었는데, 임사홍은 이것을 기회로 해서 사림파와 함께 일부 훈구파까지 제거하려 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연산군의 분노는 폭발했고, 어머니 윤씨를 폐출하는 ‘폐비정청’에 참여한 인사들 대부분을 잡아들이게 했다. 윤필상, 이극균, 성준 등 성종 시대의 대신들이 처형을 당했고, 희대의 풍운아 한명회는 이미 사망했지만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영암사림파의 중심인물 김굉필과 ≪표해록≫의 저자 최부 등은 유배지에서 처형을 당했고, 이미 죽은 정여창, 남효온에게도 추가로 죄가 가해졌다.

  이 사건이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로서 성종대의 훈구공신을 비롯하여 사림파의 씨를 말릴 정도로 대규모의 정치적 살육이 전개되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생모를 폐비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에 대한 광적인 복수극으로서, 이 사건으로 사림파는 다시 한 번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갑자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춰지지만 실제적으로는 전형적인 독재 군주인 연산군이 그의 정치적 행위(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생활을 포함하여)에 반대하는 세력(사림파이건 훈구파이건)에게 가차 없는 처벌이 가해진다는 사실을 학습하게 함으로써 추호도 비판세력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실제 갑자사화 이후 언론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지고, 국가를 사용화(私用化)하는 연산군의 ‘흥청망청’의 정치는 피크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향락과 퇴폐가 극에 치달으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 사회는 독재 군주 연산군의 폭정과 방탕을 오래도록 방치할 만큼 그렇게 허약하지는 않았다.


 
 3. 아버지와 아들

  한편 갑자사화의 주모자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는 아버지와는 달리 사림파의 길을 걸었다.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으며, 아버지와는 정치인식에 있어서 많은 견해차를 보였다.

  무오사화 때는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이유로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을 갔다. 그가 유배에서 풀려난 어느날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왔는데, 병풍에 ‘요, 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라는 글귀를 보고 자신을 비판한 것임을 직감하고 누가 이 글을 썼는지를 묻자 임사홍은 사실대로 아들 임희재가 쓴 것임을 실토하였다.

  연산군은 크게 노하였고 결국 임희재는 갑자사화로 귀양을 갔다가 처형을 당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임사홍이 고의로 아들을 참소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고도 전하는데, 권력은 부자의 정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잔인했던 것일까?

  연산군대 최고의 정치 모략가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가 사림파의 정신을 계승하여 연산군의 실정에 대항한 모습은 80년대의 정치상황을 떠올리게도 한다. 5공화국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집권 여당의 자녀들 중에서도 전두환 정권에 맞선 운동권 학생이 많았다. 임사홍과 임희재는 조선시대판 정치권력가 아버지와 운동권 아들이 아니었을까?



출처 : 한국역사연구회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read.php?pid=3&id=246

Trackback 0 Comment 0